전 러시아 FSB 요원 리트비넨코가 암살당했다. 그는 2000년 영국으로 망명한 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비판해왔다. 영국 정부의 암살 진상조사위원회는 러시아 정부가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는 결론을 내렸다.
2006년 11월, 한 남자의 사진이 영국 신문들을 뒤덮었다. 남자는 머리와 눈썹이 다 빠지고 피골이 상접해서 원래 생김새며 나이가 통 짐작되지 않았다. 죽음 직전의 병상에서 그는 자기에게 일어난 일들을 필름 재생하듯 다시 구성했다. 그 지경이 되어서도 상대의 키, 체격, 머리색, 복장 등 외모에 관한 묘사부터 행동, 동선 및 대화 내용까지 거의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었다. 그렇게 훈련을 받았다.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 43세. 전직 러시아 스파이였다.
리트비넨코는 영국으로 망명한 러시아 연방보안국(FSB:KGB의 후신) 출신 중 가장 고위직 인물이었다. 1998년 그는 러시아 정부가 재계의 거물 보리스 베레좁스키를 살해하려 했다고 폭로했다. 이로 인해 조직에서 쫓겨나고 수차례 투옥되었다. 조작된 죄명으로 다시 체포될 위기에 놓이자 그는 가족과 함께 터키를 거쳐 영국으로 탈출했다.
망명 이후 리트비넨코는 저술 활동 등을 통해 푸틴을 비난하는 데 열렬히 앞장섰다. 2003년부터는 러시아 조직범죄 전문가로서 영국 해외정보국(MI6)을 도왔다. 스페인의 러시아 마피아에 관해 조사하던 그는 이들과 러시아 고위 정치인들 간 커넥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혐의는 최종적으로 푸틴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스페인 검찰 측에 관련 증언을 하기도 했다. 이 모든 활동들 덕에 그의 이름은 아마도 푸틴이 없애고 싶은 인물 리스트의 맨 꼭대기에 당당히 올라 있었을 것이다.
일찍이 트로츠키 암살 사건에서 보듯 정적이나 위험인물을 제거하는 것은 러시아 정치의 오랜 전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전통은 옐친 시절 거의 사라진 듯이 보였다가 푸틴 치하에서 되살아났다. 다만 이전 시대의 암살이 그들이 주장하는 이념을 위한 것이었다면 푸틴 시절 주된 목적은 푸틴과 그 측근의 사적 이익을 지키는 것이었다. 바로 이 지점이 FSB 장교로서 리트비넨코를 좌절케 한 것이기도 했다.
러시아의 리트비넨코 암살 시도는 알려진 바로는 두 번 실패로 돌아갔다. ‘세 번째는 운이 좋은 법(Third time lucky)’이라 했던가. 리트비넨코 처지에서 보면 한없이 운 나쁜 일이겠지만. 2006년 11월1일이 운명의 날이었다. 이날은 6년 전 그가 영국으로 망명한 날이다.
이날 오후 3시쯤 리트비넨코는 자기를 마리오라고 소개한 이탈리아인과 만났다. 앞서 리트비넨코는 그에게 안나 폴릿콥스카야 암살 사건에 대한 제보가 있다는 이메일을 받았다. 탐사보도 전문 기자였던 폴릿콥스카야는 체첸 사태와 관련하여 푸틴 정권을 강력히 비판했다. 2006년 봄 그들이 런던에서 잠시 만났을 때 폴릿콥스카야는 신변의 위협을 강하게 느끼고 있다고 했다. 둘은 친구였다. 러시아를 떠나라는 리트비넨코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늙은 부모와 어린 자녀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했다. 같은 해 10월, 그녀는 살고 있던 모스크바의 아파트 승강기 안에서 살해당했다.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리트비넨코는 폴릿콥스카야 살해범으로 푸틴을 공개적으로 지목했다. 러시아 측에서 볼 때 그를 없애고 싶을 이유가 하나 더 추가된 셈이다.
리트비넨코는 마리오와 피카딜리서커스의 한 음식점에서 만났다. 리트비넨코는 식사를 했지만 마리오는 아무것도 먹으려 하지 않았고 폴릿콥스카야 암살 관련자라며 명단을 건네주고는, 읽고 바로 돌려달라고 했다. 미팅이 끝나자 이 의문의 이탈리아인은 글자 그대로 사라졌다.
녹차에 들어 있던 방사성 물질 ‘폴로늄 210’
마리오와 헤어진 이후 리트비넨코는 그로스브너 스퀘어의 밀레니엄 호텔로 가서 안드레이 루고보이와 드미트리 콥툰을 만났다. 둘 다 러시아 스파이 출신이었다. 루고보이와 리트비넨코는 1990년대에 같이 베레좁스키를 위해 일한 적이 있었다. 2005년 루고보이 쪽에서 연락을 취해와 동업을 제의했다. 러시아에 투자하고자 하는 서방 기업들을 유치하는 일이었다. 리트비넨코가 도착했을 때 루고보이는 차를 주문해둔 상태였다. 콥툰이 뒤이어 도착했다. 루고보이가 따로 음식이나 음료를 주문하겠느냐고 물었을 때 리트비넨코는 이를 거절했지만 테이블 위의 주전자에 약간 남은 차는 잔에 따라서 몇 모금 마셨다. 이미 식어버린 녹차였다.
그러니까 그날 오후 리트비넨코가 만난 사람은 마리오, 루고보이, 콥툰이었다. 먹은 것은 점심과 차 몇 모금이었다.
복통이 시작된 것은 저녁 무렵이었다. 통증은 곧 격심한 구토로 이어졌는데, 리트비넨코의 아내는 그 구토가 ‘보통 토하는 것과는 매우 달랐다’고 했다. 모발이 다 빠지고 구토와 설사가 지속되었다. 곧 신장 기능이 멈추고 연골이 모두 손상되었으며 백혈구가 급속히 파괴되었다. 사망까지 단 3주가 걸렸다.
의료진은 처음에 탈륨 중독을 의심했다. 탈륨은 무취·무미한 청백색 맹독성 물질이다. 쥐약이나 살충제로 쓰인다. 탈륨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았으므로 다른 미상의 독성 물질을 섞은 일종의 ‘칵테일’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조사 결과 리트비넨코를 죽인 물질은 방사능 동위원소인 폴로늄 210으로 밝혀졌다. 녹차에 들어 있었다.
폴로늄 210은 방사능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은 헨젤과 그레텔이 흘린 빵조각과도 같이 루고보이와 콥툰에게로 이어졌다. 잠시 들렀던 공용 화장실조차 오염되었다. 그들이 묵었던 호텔방의 방사능 수치는 어마어마했다. 리트비넨코 일행이 앉았던 테이블에서는 치사량의 두 배가 넘는 방사능이 측정되었다. 차 주전자, 식기세척기, 다른 식기들도 오염되었다. 리트비넨코가 귀가하는 길에 이용한 대중교통 수단에서도 방사능이 검출되었다. 그들과 접촉한 사람들, 가족들이나 그날 바에 있었던 손님들 역시 피폭당했다.
사건을 계획한 자들은 주변의 무고한 사람들이 입을 수도 있었던 위험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단지 목적 달성, 즉 리트비넨코를 죽이는 것만을 생각했다. 사실은 범인들도 모스크바에서 가지고 온 것이 무엇인지 잘 몰랐다. 단지 ‘매우 비싼 것’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범인들도 소모품에 불과했던 것이다. 영국 보건 당국은 일반 시민들의 피해가 즉각적이거나 심각하지는 않을 것이며 장기적으로 암 발병 확률을 높이는 정도에 불과할 것이라고 안심시켜야 했다. 안심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범인들은 사건 직후 러시아로 돌아갔다. 역시 심각한 신체적 상해를 입었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러시아는 이를 부인했다. 영국은 러시아 측에 범인들을 인도해달라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한편 리트비넨코 망명의 직접적 원인이 된 베레좁스키는 결국 2013년 거주하던 영국의 대저택에서 목맨 시체로 발견되었다. 검시관은 그 죽음이 자살로 보기에는 의심스러운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진상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영국 정부가 꾸린 리트비넨코 암살 진상조사위원회는 2016년 이 작전이 푸틴의 최종 승인하에 러시아 정부가 행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는 공식 결론을 내렸다. 러시아는 물론 이를 부인했다.
리트비넨코는 죽기 직전 자기를 죽이라고 한 것은 푸틴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또한 푸틴이 러시아의 대통령으로 남아 있는 한 기소할 수 없을 것이라고도 했다. 권력을 가진 악당이란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기 전에는 쉽사리 처벌할 수 없는 것이다. 악당을 권좌에서 끌어내리기란 매우 어려운 법이고 말이다. 푸틴은 여전히 러시아의 대통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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